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4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 춤 먼저 작업실의 경우 소재가 너무 특수성이 없다. 다만 보편성은 있어서 공감할 수 있다. 작업실을 얻었는데 작업실 주인이 귀찮게 한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결국 질문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고 대답은 작업실을 처분한다로 나온다. 여기서 이 여자가 진짜로 원했던 것이나 작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 권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 같은 것은 별로 조명되지 않는다. 나비의 나날은 내가 제대로 내용을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화자가 어떤 왕따 소녀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 소녀가 백혈병에 걸리고 문병갔다가 선물을 받고 자신이 배반했다고 하는데 뭐가 배반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앞의 두 소설보다는 더 특별한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외판원인데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2017. 12. 6.
캐트린 자르만, 이스터섬의 진실 이스터섬의 진실ingppoo이스터섬의 진실* 브리스톨대학교 고고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캐트린 자르만이 쓴 글입니다.—–1722년 부활절 일요일에 유럽인들이 처음 발을 들여 이스터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라파누이(Rapa Nui)에서 일어난 미스터리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졌습니다. 163.6km2에 불과한 작은 이스터섬은 반경 2천km 안에 사람이 사는 섬이 하나도 없을 만큼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가장 외딴 섬입니다. 섬에서 일어난 일을 둘러싸고 하도 많은 이야기가 덧씌워져 이스터섬은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구글맵 위성사진으로 보면 온통 바다뿐인 태평양 한가운데 눈을 가늘게 떠도 보일까 말까 한 점 하나가 이스터섬입니다.우선 이 외딴 라파누이에 사는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에서 왔는.. 2017. 12. 2.
LAURA PRITCHETT, 너무 평화로운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3년 전, 남편과 나는 20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 지었습니다.그리고 이혼 이후의 과정이 너무나도 평온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콜로라도 산속의 작은 마을에 혼란을 일으키며 가십 아닌 가십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집 앞에 차를 나란히 세워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고, 일상적으로 식사를 함께하는가 하면, 아이들이 불편하게 엄마, 아빠의 집을 오가는 대신 어른들이 양쪽 집을 오가며 지냈기 때문입니다.이러니 이웃들은 이혼 전후 크게 달라진 점을 알아챌 수 없었고, 나는 우체국 같은 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가 이혼한 게 맞다는 말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이제는 하도 여러 번 말해 대사도 술술 나옵니다.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서로를 좋아해요. 둘 다 충돌을 싫어하고 조용한 성격이죠. 누가 잘못해서 헤.. 2017. 11. 18.
Lindy West, Blaming political correctness for Trump is like blaming the civil rights movement for Jim Crow 2015년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박살내는 것이 캠프의 제 1과제”라고 말한 순간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질렀죠. 저는 트롤들에게 표를 구하는 사람이 마침내 등장해버렸구나 생각했습니다.과연, 그 후 1년 간 인터넷의 음침한 구석에서 기어나온 다양한 집단들 – 안티페미니스트, 유대인혐오자, 낙태반대론자, 백인우월주의자, 총페티시스트, 이슬람혐오자, 우파 라디오 진행자, “좋았던 옛 시절”의 남성들 등 – 이 트럼프 지지라는 깃발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미스테리의 “대안 우파(alt-right) 연합”에 대한 주류 언론의 해석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저는 비명.. 2017. 10. 22.
Rose Hackman, 역차별의 세상이 도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지면에 젠더 이슈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제 지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남성으로부터 흥미로운 피드백이 들어옵니다.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나아가서는 목소리를 빼앗겼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최근 가디언에 기고했던 글에는 한 독자가 요즘은 “진보적인 여성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으며 “보수적인 여성들”과 함께 있을 때만이 남성들과 함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이야기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며 불평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냥 넘어갔죠. 하지만 가방끈도 길고 일터에서도 잘 나가며 대체로 진보적인 한 남성 친구의 이메일을 받고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보낸 이메일에는 여성이 남성을 두들겨 패는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 2017. 10. 21.
ELENI N. GAGE, ‘햇살’이 아니라 ‘먹구름’이라도 괜찮아 저는 스물 네 살 되던 해,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룸메이트와 함께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엌 창 밖으로 교회가 보이는 작은 아파트였죠. 재택 근무를 할 때면 교회 부속 유치원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요가 바지를 입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등원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이 아파트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을 거의 싱글로 보낸 저는 언젠가 나도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마음 속에 품게 되었습니다.세월은 흘러 어느새 저는 딸 아말리아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마이애미에서 아말리아를 낳은 후 2년 간 저는 전업 주부로 지냈지만, 곧 뉴욕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두고 출근할 생각에 걱정도 됐지만, 아.. 2017. 10. 21.
진중권, 나도 메갈리안이다 “여자들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문구가 적힌 티셔츠 한 장으로 난리가 났다. 성우 김자연 씨는 이 티셔츠 사진을 올린 죄로 녹음한 목소리를 삭제당하는 변고를 당했다. 극성 마초들이 넥슨으로 몰려가 요란하게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티셔츠에 적힌 문구는 정치적으로 완벽히 올바르다. 도대체 어디에 화가 난 걸까? 문제는 그 티셔츠가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메갈 사이트에서는 나 역시 ‘개저씨’나 ‘한남충’이라 불린다. 욕먹으면 솔직히 기분 더럽다. 게다가 난 그 욕을 ‘한국남자’라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진중권’이라는 고유명사로 먹는다. 사소한 말꼬리 잡아 애먼 사람 ‘여성혐오주의자’로 낙인찍는 게 페미니즘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항변해야 소용이 없다. 그래 봤자 감히 여성에.. 2017. 10. 19.
이병태,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 한 세대가 가진 인식의 전형을 보는 듯하여 스크랩. 1.젊은이들이 왜 문제제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음2.전체적인 논지가 기성세대가 고생해서 일궈놓은 것을 현 세대가 누리고 있으니 현 세대의 문제제기는 잘못되었다는 얘기인데 인과관계가 전혀 성립하지 않음. 이병태7월 16일 오후 5:26 · Seoul 서울 ·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이 땅에 헬조선이라고 할 때, 이 땅이 살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욕할 때 한번이라도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초등학교부터 오뉴월 태양 아래 학교 갔다오자 마자 책가방 팽개치고 밭으로 가서 김을 배고 저녁이면 쇠 먹이를 거두려고 강가로 가고 겨울이면 땔감을 마련하려고 산으로 갔던 그런 분들을 처다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2017. 7. 23.
Lindy West, Save Free Speech From Trolls CONTRIBUTING OP-ED WRITERSave Free Speech From TrollsBy LINDY WESTPublished: July 1, 2017Criticism is not censorship no matter how insistent Twitter’s free speech brigade might be. 처음 “정치적인 올바름을 앞세워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검열론자”라는 비난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저는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예술가가 인종주의자라는 말을 듣기 싫으면 인종차별적인 작품을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강간은 끔찍한 일이니 코미디언이 강간을 농담의 소재로 다룰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라는 식의 악의없는 비평을 했을 뿐인데도 저런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미.. 2017. 7. 14.
또오해영과 청춘시대 연애시대, 하얀거탑 이후로 한국 드라마는 거의 끊다시피 하고 살았는데 최근 이 두 편의 드라마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한국드라마 하면 이슈가 너무 사랑타령 중심이고 그마저도 이슈에 집중하기 보다는 잡스러운 얘기들로 러닝타임을 채운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드라마는 나의 그러한 편견을 깨트려주었다. 일단 또오해영은 이슈자체가 특별했다. 결혼이 잘못된다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로 강력한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조연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자주 보던 순정만화틱한 발상이 아니라 거의 처세술에 가까운 서사를 보여주었다. 타의에 의해서 혹은 셀프조연되기라는 주제와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겪어야만 하는 심리적 모험들은.. 2016. 8. 24.
메갈티 성우 논란을 보고 메갈러라는 이유가 사람 밥줄을 끊어야 할 정도로 큰 죄인가 싶다. 그 성우가 실제로 어떤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든, 문제가 된 건 메갈 내에서 만든 왕자님 필요없다는 글귀가 쓰여진 티셔츠를 구매했고 그걸 SNS에 올린 행위인데 이런 행위의 의미와 잘잘못을 논할 수는 있다. 하지만 떼로 달려들어 밥줄을 끊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계약금을 줬으니까 괜찮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해괴한 논리들이 난무하던데 진정 미친게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허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생각들이 없나 싶다. 이 일을 두고 노동의 권리와, 처벌에 관한 사회적 합의, 실제 벌어진 행위의 위해성. 이런 것들의 관계를 다 따져보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별로 없어보인다. 정의당 논평에 관.. 2016. 8. 16.
이언 맥큐언, 속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읽는 내내 아주 재미있었지만 엔딩은 많이 아쉽습니다. 브리오니가 로비와 세실리아의 밀당?을 오해해서 로비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이야기는 아주 명확하게 다음 이야기를 강제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중에 소설 전체를 읽고 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려집니다. 극복 못한다. 이게 답이지요. 아무튼 소설을 읽는 동안은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어떻게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브리오니 개인의 성장과 결자해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목이 속죄니까요. 2장에 나오는 로비가 다이나모작전 중에 겪는 이야기들은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히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파의 집에서.. 2016. 7. 25.
국정교과서 밤샘토론에서 본 한 패널의 논리 다음은 국정교과서에 찬성한다는 한 패널이 펼친 논리입니다. '국가가 교과서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역사교육의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가 중요하다. 옳지 않다면 국가가 나서서 옳게 만들어야 한다.' 저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기 보다는 그냥 일차원적인 논리라는 관점에서 이 주장에 어떤 근거들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반문이 가능합니다. 1.'교과서를 국정화하면 당신이 생각하는 옳은 내용이 교과서에 들어가는가'2.'당신이 생각하는 옳은 내용이라는 게 진짜 옳은가?'3.'옳은 내용을 교과서에 넣기 위해서 국정화라는 방법을 사용해도 좋은가?' 유시민씨는 이렇게 정식 반문으로 접근하지 않고 아주 압축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대응했더군요. '김일성도.. 2015. 11. 22.
엘리자베스 워런, 싸울 기회 팟케스트를 듣다가 유시민 아저씨가 추천해줘서 읽게 된 책이다. 싸울 기회라는 제목도 멋있게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미국 금융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하는 내용일 것이라 예상하고 "그래 나같은 한국의 젊은 지성?이 이런 것도 좀 읽어줘야지...꽂아놓으면 허세용으로도 딱 좋겠군 크킄" 하고 샀는데 막상 읽어보니 너무나 문학적이고 감성을 건드리는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푹 빠져들었다. 전반부는 주로 자신의 생활과 가난과의 투쟁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금융자본과의 전투를 다루는데 전반부는 그냥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이 얼마나 문학적인가에 대한 예시로 어머니의 장례식 후 에피소드를 옮겨본다. 며칠 뒤 부모님 집에 있는 빈방으로 돌아왔다. 난 침대에 누워 울고 있었다. 아빠가 들어오자 나는 일어서서 두 팔을 .. 2015. 10. 14.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반전, 급전, 의외성 이런 것들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이고 이야기를 듣는 본질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하지만 의미상으로 완결된 텍스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소설에서 독자가 가장 즐기고 있는 부분은 주인공 토니가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 사랑의 파괴, 파괴된 사랑에 다신 한번 손 댈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다루는 가이다. 이 소설을 평할 때에 자주 등장하는 기억이나 역사에 관한 주제는 사실 핵심이 아니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문학에서 다루어 온 기억과 관련된 주제는 두 가지다. 기억이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블레이드 러너 등 SF소설), 그리고 윤리적인 이유로 기억이 왜곡되는 일.(올드보이, 속.. 2015. 9. 24.
인사이드아웃 이 영화가 잘 된 영화인지 아닌지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두 가지 측면을 말할 수 있다. 1.기쁨이와 슬픔이의 여행이 모험물로서 재미있는 요소가 있는가? 2.모험의 과정이 '슬픔도 필요하다'는 주제와 닮아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실패했다. 먼저 이 모험이 어떤 기획을 가지고 관객에게 재미를 주려는지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를 관객에게 소개하고 그 세계가 얼마나 기발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기억과 무의식을 기본으로 창조해낸 새로운 세계는 얼핏보면 기발하지만 그 속에서 겪는 모험의 속성은 모두 비슷하다. 어떤 설정들이 끊임 없이 제공되는데 라일리의 퍼스날리티와 관련된 오브제들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재미가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비유나 상징들을 읽어낼 때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 2015. 7. 21.
위플래시 평이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보려고 했던 위플래시를 드디어 봤다. 사실 나는 음악영화나 예술가의 삶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에 대해 불신같은 것을 좀 가지고 있다. 예술가를 미화시켜서 얻어낸 파토스를 동력으로 앙상한 이야기를 끌고나가다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가지는 한계가 아닌가 싶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외형과 보편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술가류 영화들에는 이 보편적인 이슈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의 주요 이슈는 앤드류의 열정이 어떤 보상을 받는가이다. 테렌스 플레쳐식의 경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멀쩡한 여자친구와도 결별을 선언하는 등 그의 열정은 어떤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인다. 일단 여기에 특수성이 있다. 이 자체로 낯선 것이기도 하거니와 영화의 표현 방법이 상당.. 2015. 7. 6.
할런 코벤, 6년 사라진 여인, 증인보호 프로그램이라는 두 가지 컨셉이 섞여 있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별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사라졌다는 후킹은 강력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질문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텍스트가 될 수도 있었던 '그녀는 나의 무엇이 싫어서 떠났는가?' 혹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라는 주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새삼 '나를 찾아줘'가 얼마나 잘 된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을 당한다면 누구라도 자신이 한 행동을 되집어보고, 의미들을 생각하고, 놓친 게 무엇인지, 자신의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스스로를 객관화해야만 하는 상황, 바라는 것과 실제로 일어난 것의 괴리,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는 주.. 2015. 2. 21.
데니스 르해인, 더 드롭 거창한 야망이 아니라 소박하고 평범한 행복이라도 맛보려면 더러운 일을 해야한다는 아이러니가 장르소설의 클리쉐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소설 전체에 흐르는 밥의 정서는 패배자, 불가역성, 필연적 굴종, 미완의 구원과 같은 것인데 이는 르해인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같은 것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불행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이러한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모든 정서의 주인인 밥과 대비되는 사람이 마브인데 그는 밥과 별로 다른 처지에 있지 않지만 밥보다는 좀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탕'을 노리는 사람으로 범죄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과 같은 인물인데 결국 밥의 영리함이 그를 파멸하게 만든다. 언뜻보면 마브는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자 기만자, 악당 같지만 따지고 보면 밥도 마찬가지로 .. 2015. 2. 15.
다니엘 키스, 앨저넌에게 꽃을 어둠의 속도가 주었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늘 함께 거론된다는 이 작품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작품 역시 자폐인이 뇌 수술을 통해 지능향상을 꾀한다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어둠의 속도가 지능 향상 수술을 받기 전의 자폐인이 어떤 윤리적 이슈 앞에 당면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이 작품은 실제로 지능이 나아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전체 과정을 보여준다. 지능이 나아져도 별로 행복해지지 않더라는 아이러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찰리는 지능이 나아지면서 자신이 실험용 쥐-앨저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좀 더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를 원하게 된다. 또한 과거의 자신에게 가해졌던 부당했던 대우나 비웃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발견하여 수치스러워하기도 하고 친구인줄 알았던 자들이 친구가 아니었음을 알게되어 고독.. 2015. 1. 2.
어둠의 속도 그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강력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자폐인들이 증상을 역행시키는, 즉 정상인이 될 수 있는 치료를 받기를 강요당하는 상황이라는 설정이다. 이들은 치료를 받는 것이 나은지, 그 반대인지,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는 온전히 나로 남아 있을지 등의 이슈의 폭발을 보여준다. 물론 이게 재미있기 위해서 자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폐인의 주요 특징 하나는 감정언어들을 잘 번역하지 못한다는 점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에 관해 전혀 모르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폐증인 사람들은 이런 신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에 그렇게 씌여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안다. 이런.. 2014. 12. 18.
네가 있어준다면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이후로 영미권 청소년 소설이 좋아졌다. 예전에 기억전달자를 읽고 이 분야의 작가들이 상당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기억전달자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다는 네가 있어준다면을 언젠가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자주 가는 까페꼼마에 책이 꽂혀 있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역시 뛰어난 소설임이 분명하다. 이야기의 강한 동력은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만 살아남은 미아가 자신도 세상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끔찍한 상황을 감수하고도 세상에 남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강한 이슈로부터 나온다.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미아는 유체이탈 상태 같은 것을 경험하는데 그 와중에 사람들의 반응을.. 2014. 8. 10.
죽음의 부작용,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병 이야기는 언제 봐도 재미있는 서사의 아이템이다. 남이 아픈 걸 보고 재밌다고 하는 것 자체가 좀 괴상하지만 적어도 서사 속에서 병이란 게 정말 재밌는 건 사실이다. 뛰어난 작품들 속에서 병은 어김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비틀고 선택을 강요한다. 이게 재미의 본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암의 부작용’ 이나 ‘죽음의 부작용’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 어떤 병의 서사도 병이나 죽음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작용을 다루며 이는 이야기의 좋은 주제가 된다.병의 부작용들은 물리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말하자면 수도 없지만 이 중에서도 주로 이야기에 힘을 부여해주는 측면은 바로 윤리적 의무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한 사람과.. 2014. 8. 3.
스콧 펙, 거짓의 사람들 악을 거짓, 자기기만, 나르시즘, 나태함, 권력행사 등의 개념으로 정의했다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사실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측정 가능한 사실로부터 나오는 판단이 아니다. 가치판단이나 윤리적인 판단에 가깝다. 그래서 오직 이것만이 악이다라거나 모든 악의 근원이 이것이다라고 우기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책을 덮어버릴 수 있었으나 저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런 식의 아포리즘도 좋아한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를 보면 '모든 죄는 도둑질의 변종이다'는 개념이 나온다. 극단적이고, 문학적이고 무엇보다도 살인과 도둑질이 이어져 있으며 사소한 도둑질이란 없다는 암시가 근사하다. 마찬가지로 악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그리고 그 원인으로 나르시즘을 지목한 것은 참으로.. 2014. 7. 28.
미시시피 미시시피 이 소설 속 래리 오트라는 인물은 미스틱 리버의 데이브 보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엄청난 찬양이라는 점을 눈치채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인물들에게 끌리는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일단 이 사람들은 루저나 프릭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다. 사회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뭔가 실패한 듯한 인생을 살고 있다. 사실 이런 루저들의 이슈는 별로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서사 속에서는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진다. 한국 영화 괴물에 나오는 가족들이나 미스리틀선샤인에 나오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뭐랄까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극을 위해 만든 캐랙터 같고 장난스럽다. 물론 그런 캐랙터들도 나름의 유쾌함과 미덕이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루저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슈들, 사회적으.. 2014. 7. 19.
경험이라는 쓸데 없는 권위 내가 어디가서 여행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며 별로 좋은 일 같아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면 항상 엄청난 반향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여행에 관한 온갖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하고 해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얘기가 어김없이 돌아온다. 이와 비슷한 주제로 섹스, 출산, 모성, 부성, 살인, 형제애(나는 외동아들이다) 등등이 있다. 경험하지 못했으면 함부로 판단내리지 마라. 과연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듣고 자신의 경험이 폄하당한다고 생각한다. 가치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바로 그거다. 정확하게 그것들이 하찮다고 지금 나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 문제삼고 싶은 것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경험에 대한 몰이성적인 추종이라 할 수 있다... 2014. 7. 6.
길리엄 플린,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이 소설에는 처음 보는 것이 있다. 실종된 아내를 찾으면서 드러나는 팜므파탈의 속성이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슈, 마치 알랭 드 보통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보편적인 주제, 바로 '노력하기를 멈춘 남편'에 대한 실망과 처벌이라는 점이다. 로맨틱 코메디에나 어울릴 법한 주제를 스릴러 소설 속에 끌어들였는데 사실 웃어넘기기에는 굉장히 절박한 문제이며, 행복의 척도와 관련된 것이라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와 서사의 외형이 잘 들어맞는다. 사라진 아내를 찾는 일은 필연적으로 왜 사라졌는가? 어떻게 사라졌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아내의 기획이 드러난다는 반전과 남편의 선택, 아내가 내몰리는 과정 끝에 나온 결말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손색이 없다. 에이미가 닉을 엿먹이.. 2014. 7. 1.
공교육에 대한 생각 나는 오래전부터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옛날 학교 선생들은 형편없었다. 잘 가르치고 못가르치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인 소양이 없었다. 예전에는 학생인권 같은 것들이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고 폭력이나 처벌에 대한 개념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듣자하니 요즘은 많이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지금의 학교 선생들도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임용고시를 보고, 무슨 목적으로 선생이 되려하는지, 그 과정은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끔직한 수준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대체로 직업적 안정이다. 그들이 치루어야 할 과정은 고시공부다. 지금의 시스템 상 일단 교사가 되고 나면 더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할 이유가 별로 없다. .. 2014. 6. 1.
사실을 취급하는 방법, 조건과 내적 논리 우연히 재미있고 영감을 주는 글을 발견하여 읽고, 하게 된 생각들을 적어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식상한 주제이겠지만 나는 이런 글을 읽고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과학은 사실들에 대해 매우 엄밀한 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에 한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바로 가치중립적이다. 과학이 왜 중요한지를 답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을 만들어 내는 영감도 과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훌룡한 과학자는 사실을 잘 모아서 적는 사실 오타쿠가 아니라 영감을 찾아헤매는 예술가에 가깝다. 아인쉬타인은 이런 점을 가르켜 나는 코가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자기도 그게 왜 답인지 잘 모르지만 이게 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후에 그걸 .. 2014. 5. 31.
겨울왕국, 맥락의 가장자리 전체적인 서사가 형편없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반드시 칭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엘사의 각성이라는 이야기는 굉장히 낯선 정서적 에너지를 동반하는데 이는 감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여러개의 레이어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엘사는 고립되었는가? 해방되었는가? 엘사의 고립은 성장인가, 후퇴인가? 혹은 이기적인 행위인가 이타적인 행위인가? 서사의 동력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에서 이처럼 감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 뒤의 서사는 이에 대해 별로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이게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되려면 엘사의 부제가 왕국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엘사가 떠남으로 인해 오히려 얼어붙었던 왕국이 번영을 맞이한다면, 혹은 엘사가 돌아가야할 이유와 돌아가지 말아야할 이유가 충돌한다면.. 2014.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