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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둠의 속도

by skarly 2014. 12. 18.

그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강력한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자폐인들이 증상을 역행시키는, 즉 정상인이 될 수 있는 치료를 받기를 강요당하는 상황이라는 설정이다. 이들은 치료를 받는 것이 나은지, 그 반대인지,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는 온전히 나로 남아 있을지 등의 이슈의 폭발을 보여준다. 물론 이게 재미있기 위해서 자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폐인의 주요 특징 하나는 감정언어들을 잘 번역하지 못한다는 점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에 관해 전혀 모르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폐증인 사람들은 이런 신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에 그렇게 씌여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안다.


이런 상황속에서 자폐인은 정상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혹은 그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어떤 선의에 의해 상당한 노력/수고를 해야만 하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견뎌야만 한다. 물론 정상인들이 혐오를 견디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고 어찌보면 무감각해보일 수도 있어서 혐오조차도 견뎌야할 것이라기 보다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 무엇에 가깝다.


돈의 이야기는 결국 이런 이해의 과정을 거쳐 무엇에 도달하는가에 관한 것이며, 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슈에 영향을 미친다.


자폐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상인이든 자폐인이든 누구나 못하는 것>을 그것이 정서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정상인들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례짐작한다는 점이다.


지금 마저리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뭔가를 같이, 내가 마저리를 볼 수 있는 뭔가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저 그녀가 다른 사람과 말하는 모습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마저리가 나를 좋아한다면, 내가 알 수 있을까? 마저리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를 많이 좋아하는지, 조금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다른 남자들을 좋아하듯이 좋아하는지, 어른이 어린이를 좋아하듯이 좋아하는지 모른다.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는지 모른다. 정상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영영 결혼을 못 할 터이니. 


정체성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차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관에게는 애런데일 씨이고, 대니에게는, 비록 그도 경찰관이지만, 루이다. 톰과 루시아에게는 펜싱 선수 루이고, 알드린 씽게는 직원 루, 센터에 있는 에미에게는 자폐인 루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어지럽다. 왜냐하면 속으로 나는 세 사람이나 수십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트램플린에서 뜀을 뛰든 사무실에 앉아 있든 에미의 말을 듣든 톰과 펜생을 하든 마저리를 보면서 따뜻한 느낌을 받든 똑같은 루이다.



독자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봐 루, 우리도 그 문제에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다가 "어쩌면 나는 너보다 그 문제에 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더 없어."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독자가 자폐인을 보면서 주로 느끼는 것은 어떤 고결함에 가까운 감정이다. 루의 반응은 어떤 식으로든 '윤리적 지향점'을 품고 있다. 고결한 감정은 이 윤리적 지향점으로부터 나온다.


이야기의 외형과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소설의 엔딩은 실망스럽다. 그러나 강력한 이슈와 소비해야할 이슈들을 충분히 소비했다는 충족감, 풍성한 디테일 때문에 그런 것이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최종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라 할 수 있는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를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