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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니엘 키스, 앨저넌에게 꽃을

by skarly 2015. 1. 2.

어둠의 속도가 주었던 임팩트가 너무 커서 늘 함께 거론된다는 이 작품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작품 역시 자폐인이 뇌 수술을 통해 지능향상을 꾀한다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어둠의 속도가 지능 향상 수술을 받기 전의 자폐인이 어떤 윤리적 이슈 앞에 당면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이 작품은 실제로 지능이 나아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전체 과정을 보여준다. 지능이 나아져도 별로 행복해지지 않더라는 아이러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찰리는 지능이 나아지면서 자신이 실험용 쥐-앨저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좀 더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를 원하게 된다. 또한 과거의 자신에게 가해졌던 부당했던 대우나 비웃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발견하여 수치스러워하기도 하고 친구인줄 알았던 자들이 친구가 아니었음을 알게되어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예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연애감정도 느낀다. 이 모든 문제는 빠른 지적성장에 비해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보편성이 있다. 우리 중 누가 충분히 정서적으로 성장했단 말인가? 누구나 자신이 받고 싶은 대우와 세상에 나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사이에 괴리를 겪고 있다. 찰리는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겪고 있다.


또 다른 큰 이슈는 과거의 자신이 현재를 똑바로 살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다는 점이다. 지능이 나아졌고 더 나은 삶을 살 의지가 있으면 뭔가 잘 되어야하는데 찰리는 여러모로 그렇지 못하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중요한 순간에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그가 현재의 자신이 하는 행동에 교묘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마지막으로 예정된 퇴행이라는 이슈가 이야기의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퇴행이 완전히 진행되기 전에 어떤 일들을 마무리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강력한 질문이 발생한다. 마치 치매에 걸린 노인이 남은 삶을 정리하는 과정과 비슷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치매 노인과는 달리 여전히 젊고 더 나은 삶을 살 기회를 가졌다가 다시 빼앗긴다는 점에서 더 간절하다.


내가 왜 이런 류의 이야기에 끌리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는 내가 ‘루저의 정서’라고 부르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데 이는 특수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내가 기피해왔던 이야기 소재 중 하나다. 예를 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이나 가족의 발견 류의 한국 영화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나의 삶은 진부하고 재미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나중에는 사소하지만 의미를 발견한다로 끝난다. 내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 대책없는 낙관 혹은 작은 의미라도 발견한다는 기만적인 엔딩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의 속도나 앨저넌은 그런 진부한 것들을 싹 다 걷어내고 실존적인 차원으로 이야기의 질을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행복의 척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와있으며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다룬다. (루저 가족들이 힘을 합쳐서 한강에 나타난 괴물을 때려잡거나 먼곳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대회에 나가지 않는다. 이야기에서 실제로 어떤 문제를 다루는 것과 상징이나 은유라는 미명하에 교묘하게 변죽만 울리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이 부분만 가지고 따로 글을 만들어보고 싶다.) 어둠의 속도와 앨저넌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외형은 작지만 실제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거대하다. 여기에는 보편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