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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경험이라는 쓸데 없는 권위

by skarly 2014. 7. 6.

 내가 어디가서 여행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며 별로 좋은 일 같아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면 항상 엄청난 반향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여행에 관한 온갖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하고 해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얘기가 어김없이 돌아온다. 이와 비슷한 주제로 섹스, 출산, 모성, 부성, 살인, 형제애(나는 외동아들이다) 등등이 있다. 경험하지 못했으면 함부로 판단내리지 마라. 과연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듣고 자신의 경험이 폄하당한다고 생각한다. 가치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바로 그거다. 정확하게 그것들이 하찮다고 지금 나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 문제삼고 싶은 것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경험에 대한 몰이성적인 추종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글 좀 쓴다는 작자들도 이런 이야기를 잘 한다. '글은 발로 쓰는 거다.' 이것이 얼마나 헛소리인지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물론 여행을 다녀와서 한껏 고양된 기분을 표현하는 일에 조차 태클을 걸고 싶진 않다. 그정도는 어이구 좋겠네 부럽다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다느니, 이번 여행 덕분에 사유가 깊어졌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참지 못하겠다.


 뭔가가 가치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논리로 훈련된 사람조차도 이런 선언과 같은 것들은 조심스럽다. 물론 일반인들에게 그런 조심스러움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며 최소한의 근거는 댈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경험추종자들은 이런 논리를 쓴다. '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고기맛을 아무리 설명한 들 알 수 있을까? 먹어보아야만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주장에 깃들어 있는 일방성과 폭력성은 둘째치고 그 자체가 틀렸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기를 씹지 않고도 고기맛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강 아는 것과 온전히 아는 것의 차이는 어떻할 거냐?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자위행위와 섹스의 차이만큼 결정적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명가능한 차이들이 있다. 심지어 자위행위나 섹스 양쪽 다 해보지 않고서도 그 차이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섹스를 해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좋다는걸 얼마든이 인정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다. 여행 역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과수 폭포나 노틀담 앞에 섰을 때 그 앞에 서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온전한 타자로서 외국인과 관계를 맷는 일의 특별함도 좋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가치와 연결되는가라는 문제는 완전히 별게다. 감각경험에서 가치로 너무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내가 여행무용론자가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행을 다녀와서 시각이 넓어졌다느니 사유가 깊어졌다느니 하는 소리들이다. 사유, 식견 이라는 단어부터가 이미 내 주장을 증명한다. 자세히 살펴보라. 경험과 이것들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이것은 별로 경험과는 무관한 일을 이야기 하면서 그것은 경험 덕분이라는 말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사유나 시각에 경험이라는 권위를 불어넣으려는 시도다. 대부분의 경우 사유가 깊어지거나 시각이 넓어진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여행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가치나 권위를 부여하려면 그것이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어렵다. 게다가 감각 경험이라는 것의 속성상 똑같은 여행지를 다녀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다를 수 있다. 대체로 여행에 대해서 이런 온갖 수사들이 난무하는 이유는 낮섬, 특별함, 가치있음 등의 개념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경험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면 왜 그런지를 얘기하면 된다. 어떤 경험인지 보다 어떤 가치인지가 더 중요하다. 굳이 여행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여행이 어떤 계기를 제공했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다다랐다고 얘기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다녀온 사람치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한놈도 없다. 왜냐? 어떤 경험만 있고 어떤 가치는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밀어붙여 보자면 우리가 하는 경험의 상당한 부분들은 가상과 현실이 겹쳐있는 상태다. 우리의 경험은 물리적인 현상과 더불어  온갖 선경험적인 것들과 함께 작동하며 완성된다. 경험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경험은 온전한 앎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그곳에 여행을 다녀온 너나 평생 한국에서 산 나나 그곳에 대한 앎이 제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경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특히 남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다면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치적 발화행위이지 의사소통의 목적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굉장히 심각한 경험추종류 짓거리 중 하나가 출산과 육아에 관한 것인데 아마도 당신은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부모와 그 아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갈등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때 아이들의 부모들이 쓰는 논리가 바로 '너도 애 낳아봐라'다. 이 문제는 윤리적인 판단과 경험추종류 짓거리가 짬뽕된 기형적인 코메디다. 이 문제를 밑바닥까지 추적해보면 옳기 어렵기 때문에 옳지 않아도 된다는 미친 생각이 나온다.


 우리는 흔히 부모님의 사랑은 무한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식을 낳아보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 경우는 에초에 명제로 취급하기에도 낮뜨거운 수준이다. 이것은 레토릭이며 프로파겐다지 실제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용납가능한 상한선, 하한선 같은 것이 있다. 부모 관계도 마찬가지다. 숭고한 행위를 보았다면 그것을 미덕으로 간주하고 칭찬하면 될 일이지 생물학적인 연관성이나 관계의 본질에 관해서 떠들기 시작하면 안된다. 희망사항과 사실을 구분하자.


 출산은 생명을 낳는 숭고한 행위라고 한다. 요즘 잘나간다는 진화심리학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통분만이니 시험관 아기니 하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건가? 이것들도 똑같이 숭고한가? 고통이 숭고함을 담보하는가? 


 마지막으로 심각한 것 하나를 더 이야기하겠다. 아직도 상당한 수의 문예창작과 교수들이나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겪어보지 않은 것에 관해 함부로 쓰지말고 네가 잘 아는 것, 너의 일상과 가까이 있는 것들에 관해 쓰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 나온 한국 소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껏 나열한 미친 짓거리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며 반지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결코 세익스피어나 디킨스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험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지식이나 가치라고 할만한 것들의 본질적인 부분은 경험이 아니라 사유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