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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사실을 취급하는 방법, 조건과 내적 논리

by skarly 2014. 5. 31.

 우연히 재미있고 영감을 주는 글을 발견하여 읽고, 하게 된 생각들을 적어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식상한 주제이겠지만 나는 이런 글을 읽고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다시 말해 과학은 사실들에 대해 매우 엄밀한 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에 한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바로 가치중립적이다. 과학이 왜 중요한지를 답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을 만들어 내는 영감도 과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훌룡한 과학자는 사실을 잘 모아서 적는 사실 오타쿠가 아니라 영감을 찾아헤매는 예술가에 가깝다. 아인쉬타인은 이런 점을 가르켜 나는 코가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자기도 그게 왜 답인지 잘 모르지만 이게 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후에 그걸 증명하려고 노력하면 실제로 증명이 되더라는 것이다. 과학연구를 하고 논문을 쓴 사람들은 논문이나 교과서에 써져있는게 뭔지 안다. 논문이나 교과서는 마치 지극히 당연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거쳐서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쓰지만 연구단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구단계에서는 종종 그 반대다. 우리는 여러가지를 시도하지만 왠지 이게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수히 모든 가능한 경우를 다 시도해서 답을 찾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예는 과학적 성과가 사실의 수집보다는 추론과 해석으로부터 나온다는 통찰을 잘 보여준다. 원래 이 인용문은 사실의 한계와 오용을 비판하는 글의 일부이다. (원문 http://blog.daum.net/irepublic/7888596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글입니다. 이 블로그 글이 대체로 좋습니다.)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의미를 생성할 수 없고 사실에 대한 해석과 맥락을 결정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다는 말에 백프로 동감한다. (물론 과학의 의미를 보편적인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과학의 범주에 관한 것은 이 글의 논의대상이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나는 사실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을 넘어서서 무엇이 해석과 맥락을 결정하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때로는 모든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여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요즘 횡횡하는 허무주의나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조건과 내적 논리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내세운다. 조건이란 사실을 취급하기 위한 전제와 범주다. 내 여자친구의 얼굴이 동그란 원과 같다는 주장은 3차원인 여자친구의 얼굴을 2차원적 도형에 비교해본다는 조건 아래에 가능하다. 이 조건과 동그랐다는 주장이 합쳐진 것이 내적 논리이다. 즉, 언제나 동의할 수는 없지만 특정 조건 안에서는 성립하는 것이 바로 내적 논리다. 그래서 사실과는 동떨어졌지만 가령, 내 여자친구는 한가인과 닮았다 등 비슷한 내적 논리는 얼마든지 성립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성립 가능한가이다. 내적 논리가 있는 주장은 적어도 일말의 유효함을 가지고 있다. 아주 아주 특수한 조건이라 하더라도 그 조건 아래에서는 그런 식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복잡한 예를 들어보자. 이 경우 조건은 관점이나 맥락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간통죄가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은 법이 개인의 사적인 삶에 관여하는 정도가 제한적이어야한다는 생각과 강제된 것이 아닌 개인들의 자발적인 신체적 접촉은 법의 관여 범위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등의 관점 아래에서 유효하다. 그 반대편에는 실제로 간통죄가 없어지고 나면 남편들은 자유롭게 바람을 피울 수 있게 되고 손쉽게 이혼하게 되며 결혼으로 인해 주로 직업이나 경력을 희생하는 쪽인 여자들이 위자료를 받을 수 없게 되어 경제적 피해를 홀로 떠안게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간통죄와 관련된 법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실제로 발휘되는 법의 효력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관점이다. 이 경우 양쪽의 주장 다 내적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 두 주장을 취급하는 방법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행복추구권에 관한 주장은 사실과는 상관 없다. 행복추구권은 개념이며 물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합의라던가 윤리 등 관념적인 문제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간통죄의 효력에 관한 주장은 확인해봐야 할 사실들이 꽤 있다. 실제로 위자료가 어느 수준에서 집행되는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결혼으로 인해 직업적, 경제적 불이익이 어느 정도 따르는지 등은 사실에 관련된 것이다. 다만 그 사실들의 정도가 법을 바꾸어야할 수준인지 아닌지는 역시 관념과 윤리의 문제이다.

 

 나는 이 글에서 결국 간통죄 법을 어떻게 해야된다는 결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을 취급하는 방식에 관한 예이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하나의 관점이 사실을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논리적 연결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주장을 비판하려 한다면 여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님을 주장하며 조건 자체를 무효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여성이 받는 불이익이 너무 미미해서 간통죄 법을 유지하자는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내적 논리와 관련된 것이며 특정조건 아래에서, 혹은 한시적으로 유효한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의 지위나 개인의 행복추구권 등의 개념이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논의를 할 수 없다거나 중단하자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결부된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들은 논리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이 다수결이나 힘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어떤 내적 논리의 과정들이 의사결정의 토대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하고 또 기록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부작용이 생겼을 때 반대편에서 공격할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들은 흔히 말하는 '법리'가 될 수도 있고 관습법이나 사문화된 법의 근거가 될 수도, 심지어는 헌법이 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