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진중권,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흉하니?

by skarly 2021. 11. 5.

티셔츠 한 장이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이 논쟁이 티셔츠 사진을 올린 그 성우의 밥줄을 끊어놓기 전에 벌어졌다면 훨씬 좋았을 터이나, 급한 남근들은 전희를 생략한 채 발기부터 했고 그 결과 구체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그들은 비록 목소리를 삭제당했어도 성우가 프리랜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았으니 피해본 게 없다고 주장한다. 야비한 변명이다. 일단 그는 다시 넥슨에서 일을 받지 못할 게다. 쓰지도 못할 목소리를 왜 돈 주고 사는가? 다른 회사에서도 일을 받기 힘들 게다. 그들이 넥슨에 했던 그 극성스러운 짓을 다른 회사에라고 못하겠는가?

 

이렇게 구체적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이 하나 없다. 메갈의 성격이나 미러링의 효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양측이 해야 할 것은, '일군의 남성들이 집단 이지메로 한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을 저질렀다'는 명백한 사실의 인정이다.

 

"왕자가 필요 없다"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산 것이 남성을 혐오한다거나, 메갈리아를 지지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설사 '미러링'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게 일자리를 잃을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미러링'은 나 역시 즐겨 사용해 왔으나, 그동안 누구 하나 거기에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 성우는 그저 사진 한 장 올렸을 뿐이나, 나는 아예 '메갈리언' 선언을 하고 심지어 메갈리아를 공격하는 남성들을 싸잡아 '실X'이라 모욕까지 했다. 티셔츠 한 장에 그토록 흥분한 남근들이라면 당연히 내 밥줄도 끊어야 할 텐데, 그 흔한 항의전화 하나 걸려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메갈리언을 공격하던 이들은 당혹스러울 게다. 우리 편이라 믿었던 진보언론에서 메갈리아의 편을 들어주고, 적이라 생각했던 일베에서 외려 자기들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머리에 뇌라는 게 담겨 있다면 이 괴상한 '남성연대'의 상황을 보고 한 번쯤 이런 의심을 해볼 게다. '혹시 내가 그동안 뭔가 잘못 생각해 온 건 아닐까?'

 

일베-디시-엠팍-오유가 '하나'가 된 것이 어디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이번 사태는 정치적 진보성향의 커뮤니티 남성들도 여성문제에 관한 한 결국 일베와 다르지 않다는 불편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럼에도 남초 커뮤니티들은 자신들이 일베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게다. 이해할 만하다.

 

그게 이런 문제다. 10여 년 전 부산대 여학생 몇 명이 '월장'이라는 웹진에 예비역 선배들의 성차별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렀다. 말이 '곤욕'이지 실은 사이버 성폭행까지 당했다. 거친 논쟁 끝에 민망해진 남근들이 초라하게 쪼그라든 즈음, 문제가 된 그 글의 모델이 된 예비역 선배가 여학생들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란다. "그런 일 있었어? 다음부터는 오빠한테 얘기해. 그런 놈들 오빠가 혼내줄게."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공주 구하는 왕자 노릇을 하려 한 게다. 이래서 '미러링'이 필요하다. 말로 하면 못 알아들으니 여성들이 그 앞에 거울을 갖다 놓은 것이다. 귀두만 민감한 단세포들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뇌가 기능하는 남성들은 그 거울에 비친 흉한 모습에서 제 모습을 볼 게다.

 

혐오도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 여성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은, 표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여성에 대한 차별'폭력'성폭행 등으로 이어질 구체적 위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들의 미러링이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이 어디 소라넷처럼 메갈에 모여 강간 모의를 하던가. 아니면 발 앞에 담배꽁초 버렸다고 남자를 칼로 찌르던가.

 

거울 속 영상이 그렇게 보기 싫은가? 그럼 그 앞에 선 자들이 표정을 예쁘게 지을 일이지, 거울을 깰 일이 아니다. 거울은 거짓말을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