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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by skarly 2018. 9. 6.



25살에 이걸 썼다는 게 말이 안된다. 18살에서 24살 까지 어떻게 살아야 25살에 이런걸 쓸 수 있는지 나로서는 감도 안잡힌다. 이 책의 아이디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책 초반에 저자가 하는 선언에 주목해야 된다.


"나는 윤리나 당위는 잠시 접어두겠어. 대신 여성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역사를 되집어가며 설명해줄테니 잘 들어봐."


보통 이 정도로 지르면 나는 바로 무릎꿇는다. 뒤에서 책임을 안지면 비판하기야 하겠지만, 초반에 이렇게 지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멋있기가 거의 니체급이다. 심지어 그녀는 저 말에 끝까지 책임진다.


이 책의 주요 아이디어는 분석의 타겟을 남성권력 그 자체로 잡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역사적 맥락들로 잡았다는 점이다. 즉 <생물학적 생식과정에서의 역할 분배>, 그리고 억압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는 <가족>이 그 주요 타겟이다. 마르크시즘이 부르조아지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속성에 대해서 파헤쳤던 것처럼 그녀의 접근은 구조주의자의 태도 + 유물론적 전통위에 있는 뭐랄까 약간 논리실증주의자의 태도 같은 것이 섞여있다. (이러니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후반부에 사랑과 로맨스에 관해 논하는 부분은 이렇게 평하고 싶다. 사회과학 서적이 이렇게 잼있어도 되는건가? 추측컨데 알렝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나 케롤라인 냅의 드링킹 같은 책들은 이 책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아이디어가 파격적인 만큼 논리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꽤 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결판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이미 결판났다고 가정하고 말하는 부분들이 있다. 지배의 강화에 대한 설명 부분이 그것인데 남성 지배의 강화 혹은 유지가 오로지 기득권의 권력의지에 의해 흘러가는 것인지, 별도의 생물학적-심리학적 원인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성에 의해,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홍수에 의해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게 결판이 날 문제가 아니다.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 정합성은 있지만 어쩐지 너무 편리해보인다. 


아마 현세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로서 이미 역사가 지금의 상태까지 흘러온 마당에 젠더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차이에 관해 계속 파는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그 땅파기 끝에는 남녀간에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심리학적 본성의 차이(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페미니스트로서는 절대 인정하기 힘든 반동적인 결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 있게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는 그런게 있든 없든 옳은 것을 선택하자는 말이며 이미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그런 옳은 선택을 할 외적 조건들을 갖추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거의 인류보완계획에 맞먹는 과격한 주장이며 또한 멋있는 주장이다.(그녀의 멋있는 이름이 에바 7호기 파일럿 이름같다는 나의 느낌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가 초반에 했던 원래의 주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본능에 굴복하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다면 바꾸면 된다. 나는 그녀의 선택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본질은 없고 조건이 전부일지도 모른다.(이 말을 어느 철학자가 한건지는 까먹었다;;)